김갑진 연금술 - 빛선과 소리선 
2024
알겠다. 
우주가 연금술 이라는 것을.
우주는 스스로 연금술을 펼치며 무한과 영원으로 향해 있다.

나는 우주의 연금술을 생각하며 ‘빛선과 소리선’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그렇게 나만의 방식으로 연금술을 펼치며 작품을 한다.
거대한 화엄세계의 인드라망 구조 속에, 연속된 과정으로 나타나는, 존재의 본질을 찾아 들어간다.

연금술의 미시세계와 거시세계의 작동 방식은, 우주 에너지가 공명과 떨림으로, 진동과 파동으로, 우주의 연금술을 연속적으로 펼치는 것이다.
수없이 많은 무량의 조각, 그 파편들이 연속된 실금처럼 어우러져 어떠한 결을 이루고, 흩어지고, 모이고, 결합하면서, 무한과 연속의 과정 속에, 
어떠 한 상황 전개가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적인 연금술의 현상이다.
이것이 곧 우주이다.
존재이다.
실체이다.

연금술의 도가니!
물길과 불길의 도가니 속, 그 황금 도가니를 직시한다.
응축되고 분해가되어 한데 어우러진 도가니를 응시하다보면, 존재의 근원에 다가설 수 있다.
검붉게 응축된 세계 속에서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는, 시원의 본질이 들어있다.
융합과 변화, 분해와 소용돌이가 한데 어우러져 피어오르고 꿈틀거리며, 존재의 바탕을 펼쳐 보인다.

우리의 존재는 연금술의 연속이다.
우리의 삶은 연금술의 과정이며, 상황적 현상으로서만 나타나는 모습일 뿐이다.
그 어떠한 것도 실체의 고정된 불변으로 존재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며, 늘 변화의 연속성 속에 놓여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얻으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공정성에 이르게 되며, 
자유로움을 얻어 결합과 분해의 법칙 에 순응하게 된다.

우리의 삶이 존재한다고 느껴질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한다고 느껴질 때 우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통해서 존재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존재는 연금술 속에서 꿈틀거리며 과거, 현재, 미래가 따로 없으며, 시간의 실체를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체화 할 수 없다. 
하나의 거대한 공명통의 우 주적 모듈 속에 존재하며, 확률적 상황 전개의 현상들 속에 있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과거, 현재, 미래는 어떠한 물리적 현상으로서 규정될 수 없으며,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명백하게 증명해낼 수 없으며 도출해 낼 수도 없다.
단지 우리는 가시광선의 영역 속에서 느끼는 감각을 통해서, 반응하고 인지하며 
시간과 공간, 과거, 현재, 미래를 인식해 개념화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적(靜寂)의 고요 속에 참으로 고귀하고 여여하며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모든 것이 있는 그 자리,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존재가 아름다움의 자리이며 그 자체이다.

존재하는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이며 자유의 자리이다.

나의 회화는 이러한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며, 연금술의 상황적 현상 과정을 담은 것이다.
무한성과 영원성, 양자 얽힘과 중첩, 불확정성과 비국소성, 화엄세계와 인드라망의 구조를 회화적 언어로 표현하고 나타내며, 
그 깊은 현(玄)의 세계 에 다다르고자 하는 것이다.
회닉(晦匿)이후에 오는 선요(鮮耀) 
2015
2011년 존재와 사색을 발표하고 이어서 2013년 침류(沉流) 그리고 회닉(晦匿)에 이르렀다. 존재와 사색은 나를 다스리고 정화시키며 나의 소망과 간절한 염원의 끈을 붙잡는 심정으로 작업하였다. 한없이 슬프고 어려운 시련의 계절이었다.
이 후 침류(沈流)의 작품은 본질적 근원에 대한 성찰을 찾아 명상하고 참선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시간 속에서 근원의 바탕을 찾는 여정이었다. 현상계와 비현상계, 물질과 비물질의 겹침과 응결의 작용이었고 수백만 개의 선(線)을 그어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성찰과 자각 파동과 떨림 공명(共鳴)현상과 프렉탈이론(Fractal theory)의 원리작용이 나타나고,  우주적 현상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제 회닉(晦匿)의 시간
“이 선(線) 하나하나는 나의 호흡이요 나의 세포이다”
“나의 호흡 하나하나를 뱉어 나의 세포를 뜯어 널부러진 이 공간위에 뿌리면서 어느 바람의 층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의 시간은 사각사각 붓끝을 타고, 시간의 간극 사이로 스며들어 어느 진공의 미늘 속에서 여린 촛불하나 파르르 떨면서 공명(共鳴)의 혼(魂)을 갉아 먹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선(線)들은 무한(無限)으로 가는 과정이며 무(無)의 세계로 가는 과정이다. 역설적이게도 존재를 나타낸다. 존재는 또다른 존재의 대상을 위한 과정의 존재이다.
그 존재의 과정은 우주와 자연의 무한성이며 영원성이고 근원적인 본질이며 무(無)에 가깝다. 
무(無)의 세계는 많아지거나 적어지지 않으며 가득 찬 충만과 텅빈 충만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를 내포하고 있다. 
무(無)로가는 과정은 지워가는 과정이며 채워가는 과정이기도하다. 우주의 무한성원리와 생성의 본질 같은 것이다. 그 과정은 하나의 호흡의 반복이며 세포의 생성과 소멸이며 파동이며 떨림이다. 
그러한 화면은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고 하나이면서 무한이고 무질서이면서 질서이고 시간과 공간의 응축이자 확장이며 나의 호흡과 파동을 일치시키는 과정의 연속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 곳에서 무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으며, 어느 깊은 나락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며 자유로운 근원을 맛볼 수도 있음이다.
놓여 진 시간과 공간에서 나의 호흡과 괘(掛)를 맞추어 하나의 세포 또한 생성과 소멸이 일어난다. 시간의 간극사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 법칙의 연속성은 멈춤이 없이 이어진다.
선(線)은 쌓이고 쌓이면서 수천 수만 수백만 무한의 여정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며 그 시간은 어느 신비의 경이를 맛보게 해주며,  깊은 고요 속에서 녹아내리는 우주적 본질을 발견하게 해준다. 우주와 자연의 진동과 떨림 그 파동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공존하며, 하나의 모듈 속에서 서로 얼 키고 설 켜 정교하게 짜 맞추어진 그물과 같이 조직적인 구조 체처럼 서로의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유기적이고 무기적으로 유통하며  연기(緣起)의 법칙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절대 무리수( )처럼 무한의 시간과 공간속에서 무한의 법칙과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Heisenberg`s Uncertainty prinaple)의 원리와 함께, 우주의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과 공존성, 영원성을 지니고 있다.
내 작품이 가진 특수하고 두터운 밀도는 그 어느 타자의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미니멀니즘(Minimalism)이나 모노크롬(Monochrome)회화의 범주가 아닌, 내 작품만이 가진 특성이며 시간과 시간의 간극사이와 공간의 층에서 쌓여진 어느 심연의 세계에서만 관통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으며, 선요(鮮耀)에 이르게 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회닉(晦匿)이란?
모든 존재의 개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그러한 현상만을 인식하고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성찰과 사색은 중요하며, 우리 영혼에 대한 정신적인 삶의 바탕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양분인 것이다.
우리는 현상적 대상으로부터 지워진 것과 가리워진 것 그러한 요소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룰 때만이 보다 더 인간답고 인간 가치에 대한 숭고한 소명의식을 꽃 피울 수 있을 것이며, 아름다운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하현달에서 나타나는  가느다란 그 빛은 회닉(晦匿)이다. 그 빛은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며 내면의 떨림을 일깨운다. 
그 빛 뒤에 가리워 진 보이지 않는 부분의 의미이다.
눈을 감는 것. 눈을 뜨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내 안의 나를 보는 것과 나 밖의 나를 보는 것. 그것은 결국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존재의 현실과 비존재의 현실 사유적이고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요소로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평면적인 조형적 언어를 현(玄)의 색에서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 현(玄)의 색은 어떤 물성(物性)으로서 나타나는 그러한 색(色)이 아니다. 그 색(色)은 존재가 아닌 비존재와도 같으며 물질이 아닌 비물질의 것이며 단면이 아닌 복합 면이며 우주적 공기층과 시간 층에서 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찾고 나타내기란 불가능과도 같으며 그러한 빛의 공간에서 현(玄)의 색(色)을 찾아가는 과정은 나의 작업과정과 일맥상통하며 나의 모든 원리와 법칙의 방법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 둘 모두를 보는 방법은 명상과 사색을 통해서이다. 명상과 사색을 통한 어느 깊은 침묵의 끝자락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나의 화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 둘을 위한 공간이며 구성이다. 그러한 조형적인 언어로서 평면위에 나타난다.
현(玄)의 색(色)을 통해서 나타나는 공간적 울림은 선(線)의 겹침과 쌓임으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그 것은 나만의 조형적인 방법론이며 그러한 행위의 물성이 비물성으로 변하며 하나의 사유(思惟) 개념으로 간다.

“하나의 작은 촛불이 자신의 몸을 태우며 빛을 내지만 그 빛의 범위는 미세할 수밖에 없다. 그 빛이 닫지 못하는 무한한 공간...... 그 곳에서 가리워진 선요(鮮耀)를 찾는 위안”
“선요(鮮耀)를 위한 고요가 클수록, 침묵이 깊어질수록, 빛과 소리는 확장되어간다.”
“침묵(沈黙)과 어느 절대 고독이 주는 위안과 신비는 나에게 주어진 특별함이다.”
맨 처음 하나의 선이 터져 나오고 그 뒤를 따라 연속적으로 선이 흘러나온다. 톱니의 수래 바퀴처럼 잘 짜 맞추어진 구조의 바탕과 같이 나의 의식과 함께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내 작품의 독립된 하나의 선(線)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셋이 되며 무한으로 이어지며, 결국 모든 선(線)이 서로 응축되고 연결되어 공간의 층(層)을 이루며, 하나의 세포가 서로 맞닿아 사물을 형성하는 이치와 같으며, 우리의 호흡이 들숨과 날숨으로 연결되어 쉼 없이 계속되는 것과 같은 원리와 방식의 과정이다. 하나의 선(線)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진동과 파동은 저 무한의 스큐어스의 수에 까지 이르러 그 떨림의 끝에 닿아있다.
그러한 선(線)으로 공간의 층(層)을 가득매운 화면은 하나의 공명통과도 같다. 그 공명통 안에서 들려오는 구도자적 성찰은 끈기와 인내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으로, 명상과 사색을 통해 평온과 평안에 이르며, 세포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처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바탕을 통해 나의 시적 영감(靈感)을 끌어내어 조형적 미감으로 작품을 승화시키며, 선요(鮮耀)에 이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찿아오는 선요(鮮耀)”
이제 온전한 이성을 찾아 주어진 조건과 환경, 철학, 사상, 과학, 종교, 이성과 감성, 원리와 논리에 의한, 물질과 비물질 현상계와 비현상계의 연기(緣起) 작용으로 우주와 자연의 그 무결성과 무한성에 괘(掛)를 맞추어 하나의 진리로 통하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순례자로서 나는 오늘의 시간들을 연명하고 있다.
침묵(沈黙)이 베푸는 위안과 함께,,,,,
회닉(晦匿): 가리워진 부분, 보이지 않는 부분
선요(鮮耀): 선명하게 드러나 보임
침류(沈流): 깊은 곳에서 고요하게 흐르는 상태
공명(共鳴): 같은 음의 울림 현상
연기(緣起): 모든 현상이 조건에 따라 생기고 소멸하는 법칙
프렉탈 이론(Fractal theory): 부분과 전체의 자기 유사성 개념, 해안선이나 동물              혈관 분포 형태 나뭇가지 모양 우주 현상 등
스큐어스의 수: 무량의수
불확정성의 원리(Heisenberg’s Uncertainty principle): 물체 또는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수 없다는 원리. (결정 불가능론)




만다라- Blue 
2021
인간과 우주 만물의 존재에 대한 물음. 무수한 선의 중첩과 반복은 무한의 공간, 시간 그리고 연속성과 영원성을 나타낸다. 끝없이 깊고 그윽한 세계로 다가가기 위해서 작은 선들을 그어 나간다. 이 작은 선 하나를 긋기 위해서는 작은 붓 날을 칼날처럼 세워야만 가능하다. 세워진 붓 날을 캔버스 면에 긋는 행위는 황하의 모래알 하나를 추려 세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모래 알갱이를 하나씩 하나씩 헤아리면서 옮겨가는 행위와 유사하다. 그저 단순한 이 행위의 반복의 연속은 본질적인 시원의 속성에 들어있는 어떠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 행위의 반복은 끝없는 무한의 영역 속에서 머무는 것이며 그 깊은 현(玄)의  세계에 맴도는 것이다.이 가느다란 붓끝 하나로 존재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의 길에 나는 서있다.
만다라(曼陀羅) 본무자성(本無自性)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철학적 사유와 원리를 만다라의 원리로 나타내며 이를 회화로 표현한다. 거시적인 시각이 아닌 미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하여야만 작품의 실체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울트라마린블루(Ultramarine Blue) 저 너머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신비의 색. 
그 색을 칠하고 선을 긋고, 다시 덧입히고 또 선을 긋고, 그렇게 현(玄)의 세계로 스미게 된다. 나의 존재는 이 선 하나 이 모래알 하나.
눈을 뜨면 

황하의 무수한 모래알 
그 하나하나를 
헤아린다. 

이 밤이 까맣게 타 올라 
식어버릴 때까지 

날마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는 하얗게 식어버려 
중천에 떠있다.
빛의 소리와 우주의 진동이 
나의 영혼과 에너지를 녹여 내리면
나의 심장은 두근거리고
영혼은 눈물을 흘린다.

만다라 속에는 존재론과 우주론이 들어있다.  

“존재”

 인간 존재와 우주 만물의 존재에 대한
 명상과 사유 그리고 성찰과 물음을 담아
 명상적이고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물지정
2019
이 그림의 선들은 미세한 세필로 그려진 것이다.
처음 하나의 선에서 시작하여 수천, 수만, 수백만, 무한으로 가는 과정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의 작업은 명상과 사색의 과정으로 구도자의 길을 가는 여정과 같이 이루어진다.
나의 삶의 의미가 함축된 존재에 대한 연민 에서 출발한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방식 페인팅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회화의 요소를 뛰어 넘어, 모든 방식을 아우르고 흡수하며 설명되는 방법들이 들어있다.
철학과 사상 종교 수학과 과학적 요소들 까지 내포된 그림이다.
영원성과 무한성의 원리가 바탕에 들어 있으며, 명상과 사색이 동반한 수행의 과정을 통해 그려진다.
고뇌와 인내가 수반되는 존재의 물음에 대한 물음의 과정으로, 수도자의 면모가 작품 제작 과정에서 나타나는 요소이다.
맨 처음 하나의 선에서 출발하여 수백, 수천, 수백만, 무한으로 가는 과정을 담고 있으며, 그 과정은 구도자로서의 성찰과 깨달음을 요구한다.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 앞에서, 무(無)의 의미와 공(空)의 의미에 까지 닿아 있으며, 현대 물리학 양자역학에서 바라보는 미시의 세계와, 수의 무한대의 비밀 그 아찔한 곳까지 다다르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성찰과 존재의 바탕에 대한 영원한 물음, 그 궤적을 찾아 가는 과정의 연속으로 나타난다.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의 무한수의 추적이나,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등 과 같은. 진리의 근원을 찾아 가는 요소들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부분을 넘어, 온 우주에 존재의 바탕을 두고, 인간 존재의 연민을 성찰하는 물음을 제시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 우리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침묵
나의 침묵(沈黙)은
잃어버린 언어
열리지 않는 방안은
면벽(面壁)속에 갇혀있고
미동 없는 거미는
허공 속에 몸을 말려
박제(剝製)가 되어 있다.
                        
                

존재와 사색
간절함이 있다.
한올한올 옷감을 떠내듯이
하나하나 작은 선들을 그어나간다.
팔만 사천 번의 선을 긁어내림은 
나에 대한 사색(思索)이요.
삶에 대한 염원(念願)이며
아름다움을 위한 소망이다.
나의 감정과 영혼을 정화시켜
맑고 푸른 향을 피워 내려 함이다.
나의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번뇌와 갈등, 집착과 욕망 그리고 염원,
나의 사유(思惟)가 아무리 깊어도
반가사유상의 하루분의 사유(思惟)에 닿을 수가 없다.
나의 사유(思惟)가 침묵과 침묵사이로 흐르고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에 공기를 불어 넣어
맑은 영혼을 유지하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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