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호(문예평론가, 문학박사) 2021
작가 김갑진은 깊은 사유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화가이다.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래 끊임없는 독서와 명상을 통한 구도적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의 전시 타이틀을 보면 자기실현으로 가는 이정표와도 같다. 그 이정표의 키워드를 살펴보면 초창기에는 ‘벽(碧)’ ‘현(玄)’ ‘황(黃)’ 등의 깊이 있는 색채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했다. ‘까마귀’를 통하여 기록되지 않은 신화를 들려주기도 하고, 때론 깊은 사색에 빠져 ‘존재(存在)’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기도 하더니, 급기야 규정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사고의 카오스에 빠져들어 ‘침류(沈流)’ 또는 ‘회닉(晦匿)’과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년에는 ‘물지정(物之情)’을 모색하며 사물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더니, 이번에는 ‘만다라 블루’라는 새로운 화두를 세상에 던지고 나왔다. 필자는 작가의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 시절에 지인들과 함께 전남 곡성에 있는 그의 작업실 ‘김갑진갤러리’와 그의 제씨가 운영하는 ‘시사교육박물관 로제’에 들러 신화와 원시성에 대하여 밤늦도록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신비하게도 이튿날 그의 안내에 따라 동리산 태안사에 들렀는데, 선원 주련 중에 김갑진 작가의 작업 세계를 대변하는 값진 구절이 번개처럼 눈에 들어왔다. 
一粒粟中藏世界(일립속중장세계) 낟알 좁쌀 속에는 온 세계를 감추고 
半升鐺裏煮山川(반승쟁리자산천) 반 되들이 솥에는 산천을 넣어 삼는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갤러리의 밤엔 하늘의 별이 꽃밭을 이루고 있었고, 갤러리의 낮엔 너른 마당의 꽃들이 별밭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신비로운 천지의 조화가 하모니를 이루며 빛선과 소리선으로 사정없이 그의 화폭에 내리꽂히고 있었다. 우주의 씨앗인 빛과 소리가 그의 화면 위에서 서로 만나 오묘하게 씨앗으로 뿌려지고 작품으로 영그는 것이었다. 당시 그가 읽고 있던 책은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과 <지식의 대통합 통섭>이었다. 그윽한 시골에서 고독과 자신의 그림자를 벗 삼아 전업 작가로 살아가는 그였지만 시대 흐름을 직시하고 현실을 꿰뚫어 보는 깨어있는 작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주제는 만다라(曼陀羅)이다. 작가는 만다라 작업을 통하여 우주 생성의 본질을 캐고 있다. 그의 우주 탐색 도구는 언제나 빛이다. 그 빛을 형상화한 것이 명주 실낱같은 세선(細線)으로 나타나는데, 그 끝없는 세선의 중첩이 빅뱅을 일으키며 마침내 만다라를 창조해 내고 있다. 낟알 좁쌀 속에 온 세계가 감추어져 있듯, 그의 수없이 중첩된 세선은 묘한 파동을 일으키며 평면을 입체 공간으로, 입체 공간을 우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이처럼 구도자적인 그의 작업을 보노라면 바늘구멍으로 우주를 본다는 말이 어울릴 듯하다.    
만다라(曼茶羅)는 산스크리트어 ‘maṇḍala’의 역어(譯語)로 본질(本質)이나 정수(精髓)를 뜻하는 ‘mandal’과 소유를 뜻하는 ‘la’의 합성어이다. 만다라는 깨달음으로 가는 내비게이션이다. 그 목적지는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 접근 방법은 명상(冥想)이다.    만다라는 그리기 전도 명상이고, 시작과 과정도 명상이며, 결과도 명상이 세계이다. 더 나아가 감상자도 명상 속에 빠져든다. 만다라라고 하면 힐링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만다라는 머리보다 가슴으로 그리는 그림이다. 그래서 만다라는 심리치료에 많이 사용된다. 코로나 19, 환경오염, 지구온난화, 검증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등으로 상처 난 지구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 나서야 할 때이다. 만다라를 그려보거나, 타인의 작품을 감상하면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전통적인 오색은 청(靑)·적(赤)·황(黃)·백(白)·흑(黑) 등이다. 그러나 만다라 구성의 오색에는 백(白) 대신에 록(綠)이 들어간다. 만다라 오색은 오 대륙을 색으로 상징하는 오륜기(五輪旗)의 청(靑)·황(黃)·흑(黑)·녹(綠)·적(赤)과 일치한다. 흔히 오대양·육대주라 하지만 오륜기에서는 남북아메리카를 하나로 취급하였다.    
작가는 만다라 5색 중에서 청(靑)을 택했다. 청(靑) 중에서도 ‘만다라 블루’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로서 이는 황금보다 더 귀한 靑金石(청금석)에서 나온 염료로 서양에서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사용했던 가장 아름답고 값비싼 안료였다. 군청색(群靑色)으로 번역되는 울트라마린 블루는 거룩함과 겸손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성화(聖畫)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불교에서는 청금석을 극락정토의 칠보(七寶)의 하나로 여겼으며 청색이 ‘밖에서 안으로의 귀의’ 또는 ‘묘관찰지(妙觀察智)’ 등을 상징하므로 울트라마린 블루를 고귀하게 여김은 당연한 귀결이다. 청색의 일반적 상징도 ‘희망’을 비롯하여 ‘봄, 동방, 나무, 쓸개’ 등이 있다.
만다라(maṇḍala)는 우주의 본질이 가득한 둥근 바퀴를 말한다. 원형 바퀴 이미지는 해, 달, 연꽃 등이 그러하듯이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작가의 만다라는 구성에 있어서 원(圓)을 근간으로 하되 방(方)이 더해지기도 한다. 프레임이 사각형임을 고려한다면 모든 작품에 방원(方圓)이 나타나는 셈이다. 방원은 티베트 만다라에서 기본적으로 나타나는 구성이기도 하다. 하늘과 땅에 대한 동아시아의 전통 우주관도 천원지방(天圓地方)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보편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 작가의 만다라는 신비로운 우주를 연상케 하는 울트라마린 블루를 배경으로 하여 무수한 빛이 스쳐지나감으로써 파동이 발생하는 동적 우주 질서로 표출된다. 우주에 퍼져나가는 빛을 응시하다가 보면 우주를 유영하는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때론 마음속 깊숙이 내재해 있는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만다라 작품에 켜켜이 쌓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응시하다가 보면 블랙홀 속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 우주를 유영하다가 보면 어느덧 달과 별이 아스라이 나타나기도 한다. 가끔은 운석이 느닷없이 나타나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도 한다. 김 작가의 만다라는 분명 이차원의 평면에 구현된 그림이지만 삼차원의 공간과 사차원의 시간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만다라를 내면으로 끌어들이면 일종의 깨달음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스위스 태생의 분석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만다라의 심오한 의미와 영적 치유력을 서유럽에 소개했다. 다음은 융의 명언이다. 
“밖을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고, 안을 바라보는 자는 깨어난다.”    
이제부터 만다라 작가 김갑진은 세계 미술계의 새로운 정보 생산자로서, 남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을 캐내는 일이 일상일 것이다. 만다라를 창조한 작가이지만, 이후는 만다라가 그를 꿈꾸게 하고 깨어있도록 인도할 것이다. 이제 그의 롤 모델은 사람이 아니라 만다라이다. 특히 그만의 ‘만다라 블루’는 공유라는 이름으로 시간상으로 영원하고 공간상으로 무한하리라 믿는다. 

존재의 현(玄)-현(現)을 갈구하다 
미술세계 2018 2월호 장서윤 기자
전라남도 곡성 목사동면 대곡리, 그곳에는 지금은 아이들이 떠나고 쓸쓸함과 적막만이 맴도는 한 폐교(구 기룡초)가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진 듯한 인상을 풍기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소 사건이 실려 있는 신문 자료들, 철 지난 비디오테이프들, 스타워즈, 아톰, 배트맨 등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피규어가 교실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걸어 복도 끝에 이르자 수많은 캔버스 더미와 유화 냄새로 그득한 공간이 나온다. ‘시사교육박물관’과 ‘김갑진 갤러리’. 사뭇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두 공간은 모두가 떠난 폐교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사교육박물관은 김갑진 작가의 동생이 평생 동안 모은 자료들로 꾸려졌다고 하니, 두 형제의 수집벽이 결코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인적마저 드문 이곳에 김갑진 작가는 과연 무엇을 위해 자신의 예술적 거처를 마련한 것일까. 김갑진 작가의 작업실 벽면 한 켠에 비스듬히 설치된 채 흐르지 않는 시계가 김갑진 작가는 물론 이 공간에 대한 정답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 계속해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김갑진 작가의 시간은 이처럼 시간이 빗겨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면벽(面壁)의 틈새에 켜진 촛불
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생각 보다 고독한 업(業)이다. 으레 예술가들은 본래가 외로운 존재라는 선입견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알아봐주지 않는 상황에서 홀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는 것은 인내와 더불어 간절함을 요하는 일이다. 김갑진 작가에게 있어 그림 그리는 일이 바로 그러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림에 대한 동경을 늘 지니고 있었지만 내성적이었던 그의 성격상 미술반에 들어갈 용기는 쉽게 나지 않았다. 당시 미술반은 현재 여수 한영대학교 교수인 김혁정 작가가 담당했었는데, 그가 다른 학교로 떠나자 미술반은 폐기되고 말았다. 절박한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발휘되는 것일까. 소심하기 그지없던 김갑진 작가는 미술반이 사라지고 다른 학생들이 붓을 내려놓았던 그 순간에 용기를 내어 교장선생님께 미술반을 다시 만들어달라고 편지를 썼다 한다. 그의 간절함이 편지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던지 결국 교실 복도 한 켠에 미술실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김갑진 작가는 석고 데생이며 연필 소묘 등의 기초를 독학으로 채워나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입시 낙방 후의 군 생활도 미술에 대한 김갑진 작가의 열정을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군 제대 후 제주도에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미술 학원을 다니며 다시 미술에 대한 열정을 이어가던 시기는 마치 주경야독(晝耕夜讀)과도 같은 고되지만 서도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힘들게 노동을 해야 하는 이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림’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은 결코 굽힐 수 없었던 김갑진 작가는 일을 택함에 있어서도 마지노선을 그었더랬다. 디자인 아트스쿨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배운 후 책 만드는 곳에서 일했던 것도, 건축 투시도를 배워 투시도 회사에 취직했던 것도 결국 다 그림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림에 가장 기초라 할 수 있는 원근법이나 손의 감각은 오히려 순수미술보다 투시도법으로 단련된 것이 더 섬세하고 정확하다. 오늘날 김갑진 작가의 작품에 그어진 수많은 섬세한 선들은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갑진 작가 자신은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고된 삶이 결국 돌아와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 깊이와 농도를 더해줄 것임을. 인생에서의 고난은 결코 극복되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고난도 삶이고 삶 또한 고난이다. 고난과 삶이 함께 존재할 때 인생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김갑진 작가가 걸어온 삶, 그리고 그가 운명처럼 마주해야 했던 캔버스가 벽이었다면 김갑진 작가는 그 벽을 마주한 채 꿋꿋하게 그림을 그려온 구도자와 같다. 30년이란 시간동안의 면백의 끝에서 찾은 깨달음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고독이 묻어나는 그림
작행일치(作行一致). 예술가의 성격과 작업이 일치할 때가 있다. 모든 예술 작품이 반듯이 그래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작품에서 예술가의 모습이 묻어날 때 그 작가의 진정성은 배가 되어 울림을 준다. 김갑진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작품이 김갑진 작가인 듯, 김갑진 작가가 작품인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이것이 독학을 통해 경지에 오른 예술가에게서 느낄 수 있는 심상이라면 김갑진 작가의 외길 그림 인생은 힘겨웠던 지난날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일 테다. 
독학한 사람들은 주변의 평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자신의 그림이 가장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이라 ‘착각 아닌 착각’을 할 때가 있다. 김갑진 작가 또한 그랬다. 세상이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주지 않는 것에 대해 때로는 분노하기도 했지만, 그 분노는 더욱 작업에 매진할 수 있는 땔감이 되기도 했다. 1999년, 김갑진 작가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지 10년이 되었을 때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보상이 따라왔다. 제10회 ‘미술세계 대상전’에 출품한 〈까마귀〉가 입선에 오르며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되면서 처음으로 미술계는 물론 대중에게 김갑진이라는 이름 석 자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본격적인 예술가로서의 길은 이 이후부터라 할 수 있다. 특히 나무와 까마귀는 미술세계 대상전 이후로 지금까지 김갑진 작가의 화폭에 주로 등장하는 소재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작품 속 나무와 까마귀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검은색, 회색, 혹은 어두운 청색 계열의 모노톤을 배경으로 나무만이 외로이 서있을 뿐이다. 나무의 형상을 제대로 갖춘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꺾여있거나 불에 탄 듯 검게 그을려져 있다. 〈나무-울움〉이라는 작품의 제목이 한낱 글자로만 보이지 않는 것은, 김갑진 작가가 자연재해의 피해를 입은 나무를 찾아 수많은 장소를 떠돈 그 간절함과 더불어 대지에 홀로 상처받고 서있는 나무를 자신의 모습과 등치시키며 위로하듯 화폭에 담아낸 그의 서글픔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마치 반 고흐의 붓질처럼 요동치다가도 수묵화처럼 잔잔히 캔버스에 스며드는 김갑진 작가의 붓질은 그가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왔던 시간을 넌지시 보여준다. 까마귀 또한 김갑진 작가와의 연관성을 무시하고 설명할 수 없다. 그가 까마귀에 처음으로 시선을 빼앗긴 것은 1999년 겨울 까마귀의 역동적인 날갯짓에서 뿜어져 나오는 현묘한 광채 때문이었고 한다. 깊은 검은색과 사색의 자태에서 드러나는 고요한 심연은 김갑진 작가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무채색의 모노톤을 가로지르는 까마귀의 검은 형상은 어지러운 세상의 질서로부터 사색하고 침잠하는 김갑진 작가의 성격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와 까마귀를 자신의 고독과 등치시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작가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뿌리는 땅에 있으되 가지는 하늘로 향하는 나무는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이그드라실(Yggdrasi)’처럼 신성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하루에 한 번씩 하늘로 날아 놀라 세상에서 벌어진 일들을 북유럽 신 오딘(Óðinn)에게 보고하는 까마귀는 인간의 기도를 하늘에 전달하는 신성한 전령사이기도 하다. 땅과 하늘을 잇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세상의 이치는 김갑진 작가의 그림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고독한 그림들은 그래서 결코 그 어둠 속 깊은 곳으로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태양의 빛이 내리쬐기를, 이상적이 곳에 닿기를 갈망하는, 그래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삶의 긍정이기도 하다.
현(玄) 속에 나타나는 존재의 현현(顯現)
이처럼 김갑진 작가의 이상에 대한 추구는 고난과도 같은 인간의 삶 속에서 내면의 위안을 찾기 위함과도 연관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적인 공간에의 지향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속되어온 가장 근원적인 물음이지 않은가. 철학도 과학도 수학도 예술도 결국 인간은 무엇인지, 존재란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이자 궁극적인 물음에 대한 탐구였다. 그리고 김갑진 작가의 질문 또한 이와 같은 원초적인 질문을 향한다. 본디 사색을 즐겨하는 작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곧 사색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궁구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장 그르니에의 『섬』, 헤르만 헤세의 『크놀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등 과학, 수학, 철학서 등의 독서와 사색에 매진했고, 사색의 끝에 도달한 답은 그렇게 그림이 된 것이다. 존재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철학적 사유, 중성미자와 같은 최소 소립자에 대한 과학의 연구, 수학의 무한대 개념, 그리고 종교 또한 깊이 들어가면 결국 본질에 대한 추구라는 목적에서 만나게 된다. 
2011년 《존재와 사색》, 2013 《침류(沈流)》, 2015 《회닉(晦匿)》의 개인전을 거친 김갑진 작가의 작품 세계는 보다 단단해진 느낌이다. 철학적 사유는 존재에 더욱 가까워졌으며, 붓질의 유연함은 김갑진 작가 특유의 모노톤에 웅숭한 깊이를 더해주었다. 특히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어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현(玄). ‘검다’의 뜻을 지닌 이 단어는 동시에 ‘오묘하다’, ‘심오하다’라는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즉, 검지만 결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검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갑진 작가에게 있어 어둠은 이와 같은 현(玄)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언어로 현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저 검게 보이는 밤의 하늘도, 깊은 바다도 그 층이 끝이 없는 무한의 세계로 이루어진 현의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무수한 선을 긋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현의 구현과 맞닿아 있다.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침류의 세계, 밤하늘의 우주를 바라본 회닉의 세계는 층층이 쌓아 올린 무수한 선의 겹침을 통해 오묘한 ‘현’의 색을 발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원래 없던 세계가 오늘날 새로이 발견된 것도 아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그곳에서는 세상이 규정해 놓은 대립도, 모순도, 이분법도 서로 공존되고 연결될 수 있다. 마치와 땅과 하늘을 잇는 이그드라실 나무처럼, 인간과 신을 잇는 까마귀처럼 말이다. 그래서 김갑진 작가의 신작 《나무와 까마귀의 변주》에서는 나무와 까마귀가 현의 세계를 중심으로 모여든다.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가장 근원적인 존재가 머무는 곳. 그곳에서는 시간마저 (우리의 개념대로) 흐르지 않는다. 김갑진 작가의 작업실에 걸려 있는 시계처럼 말이다.
그의 작품은 침묵하는 가운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비록 완벽하게 가닿을 수 없는 의미이나, 본디 현이라는 게 우리 인간이 결코 알 수 없는 심오한 세계인 것을 생각하면 현을 구현한 김갑진 작가의 작품의 모호함은 외려 정답일 수도 있다. 김갑진 작가는 그림으로 현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이곳 곡성의 폐교에서 자신만의 연금술에 매진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닿을 수 없는 세계는 욕망을 촉발시킨다. 김갑진 작가의 욕망은 여전히 그 세계를 향해 항해하는 중인 것이다. 
존재와 사색 展에 부쳐 
박종석 (한국화가) 2011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일정한 특성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나 싶다. 그중에서도 예술가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는 내향형(內向型)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순수 직관을 통해 평생 창작에만 몰두하는 예술가는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예술가는 관념의 세계를 탈피하여 자유(自遊)하는 성향이 넘치며,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부와 명예와 조건 등 외향적 가치 척도에는 관심이 적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화가 김갑진은 바로 그러한 예술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의 나이 40대 후반에 들어섰는데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면서 만만치 않은 삶터에서 겪은 내적 갈등을 정화시켜 새로운 창작 작업으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의 모습에서 고고(孤高)한 성품을 발견한다. 
 
 그의 이력은 남달리 독특하다. 그림 수업을 홀로 연마하며 어려운 과정을 지내면서 보냈고, 어린 시절 산촌의 고향집 평상에 누워 올려다 본 밤하늘의 수많은 별빛 속의 무한한 상상력을 기초로 하여 30대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화단의 성격상 학맥과 인맥 그리고 스승의 그늘로 성공을 앞세운 다른 화가들에 비교한다면 그는 거칠고 험한 길을 한걸음씩 차분하게 걸어가는 수행자(修行者)라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몇 년간 공들인 작품들을 다시 세상에 펼쳐 보인다 하니, 과연 심상으로 표출된 결과를 알아보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우려 반, 기쁨 반이다. 그의 작품성은 깊은 사색에서 우러난 자연관과 인간의 존재가치에 대한 물음 그리고 현대인들의 자기성찰에 대한 자각(自覺)을 요구하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작품들의 화면은 진공상태와 같은 분위기에 수억 광년을 걸쳐서 날아오는 가느다란 빛처럼 오일로 그려진 선들을 중첩시켜 보는 이를 하여금 시공을 초월한 어느 지점으로 빠져들게 한다. 
수도 없이 많은 선들 하나하나를 긁어 나가면서 그는 명상에 빠져들고 자신을 수신(修身)하며 참선의 길로 나아가며 면벽(面壁)에 나섰으리라 생각한다. 수백, 수천, 수만, 수백만 번의 선들이 겹치고 겹치며 그만의 고행(苦行)과 자기성찰에 대한 물음과 함께 어떤 근원적인 삶의 철학을 되물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무아경(無我境)에 이르는 과정을 탐독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진정한 명상에로의 길을 작품세계의 과정 속에서 호흡하며 함께했을 것이다.
 존재와 사색, 임류(臨流), 반가사유상, 면벽(面壁), 염원(念願), 무아경(無我境)등 극히 단순화 시킨 화면들이 촛불처럼 자신을 태우며 빛을 발하듯,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존재 이유를 묻는 듯, 깨달음의 길목에서 생사의 벽을 허물듯이 명상적 공간으로 인도한다. 그러한 표현방식과 구성은 창작인 으로서 간절하게 사유(思惟)하고 체화(體化)한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깊은 색에서 뿜어져 나오는 심오함과 깊은 울림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다 달았음을 보여준다. 피상적인 색이 아닌 근원적인 저 우주의 공간이 투영되어 깊이를 알 수 없는 현(玄)의 세계에 가 있음이다.
 장자가 말하기를 “시비분별은 인간의 몫이고 분별함이 없음은 곧 자연이다.”라고 했는데 화가 김갑진은 후자를 갈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그가 존경하며 삶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삶의 자세를 알 수 있으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인간과 자연을 동시에 바라보고 분별하면서 분별함이 없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고독한 방랑자와 같다. 그가 지향하는 예술관은 적막한 사막을 걸으며 만난 여린 꽃 한 송이에 감동하고 그 안에서 우주 질서를 느낄 수 있는 미세감각을 지닌 화가라 말할 수 있다.
 
 창작 작업은 절대적 관점에서 직관력이 요구되는 표현 행위로 작가는 자유와 순수의 양 날개로 북풍한설(北風寒雪)에 맞서 날아야하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의지만이 작가의 최대의 무기라 믿는다.  
 
 화가 김갑진은 이 시대에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표상을 가진 화가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에게 황금과 교환할 수 있는 아이디어나 장식성을 요구할 수도 있고, 무지한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세상과의 소통의 끈을 소중히 다루며 진정한 예술가로서 삶을 버티어내는 굳은 절개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의 내면에 무장된 정신력은 삭막한 환경에서도 끊임없는 날갯짓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세간사 범주의 일에 초연하고 아름다운 길을 가는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그의 가족과 후원을 아낌없이 해주는 동생에게 갈채를 보내며, 그의 작품세계의 진면목을 알아보고 함께 나누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To celebrate existence and speculation exhibition
Korean painting painter  Park, Jong-seok 2011
I think that humans live with certain characteristics to some extent since they are born. Among them, artists can be said to be an introvert human maintaining quiet mind though innumerably experiencing the gap between reality and ideal. Artists who are absorbed in creation for the entire life through pure intuition can be said to be a monk who practice and especially, artists have a strong tendency to be free by escaping the world of ideas and are less interested in external value scales such as wealth, honor and conditions that usually people are interested in. 
Among them, I want to say that painter Kim, Gap-jin is such an artist.
Even though he entered in his late 40's, I find elegant nature in this appearance inspiring life with the new creative work by purifying internal conflict that he experienced in the tough field of life while maintaining pure mind like a child.
His history is unique unlike others. He went through the difficult process practicing painting alone and entered the path of full-time artist in his 30s based on infinite imagination of numerous stars in the night sky that he looked up lying on the low wooden bench of his home. If comparing him with other artists giving priority to success under their masters and school ties and personal connections due to the nature of the painting society, he may said to be a practitioner walking step by step on the rough and rugged road calmly.
He said he will spread again the works he has been working with great effort for several years and how many people will recognize the result expressed as the image? I am half concerned and half happy. His works contain a view of nature from p reflection and questions about the value of human existence and the message requiring self-awareness on self-examination of modern men. The canvases of the works make the audience indulge into any point beyond time and space by piling up lines drawn with oil like slender light flying over hundreds of millions of light years in the atmosphere like vacuum state. 
I think that he fell into meditation scratching numerous lines one by one and sat in meditation in front of the wall practicing himself and going toward the path of Zen. Overlapping and overlapping hundreds, thousands, tens of thousands, millions of lines, he may have asked again fundamental philosophy of life along with questions on self-examination and his own asceticism.
Then, I think he may have pursued the process leading to the state of complete absence of ego. In the course of art world, he may have been together breathing the  path to true meditation
Extremely simplified canvases such as existence and speculation, dusk, a thinking Buddhist image, meditation in front of the wall, desire, state of complete absence of ego etc. lead us to meditative space like giving out light burning themselves out like a candle like asking the reason for the existence of human in front of Mother Nature, breaking the barrier between life and death at the crossroad of enlightenment. Because such representation and configuration are crystals after a creator speculate desperately and learn by experience Also, profundity and deep reverberation coming out from his deep colors show that he reached a higher level.Because they went to the world of black which is in unknown depth that the fundamental universe space is projected not superficial colors.
Janja said that “right and wrong and differentiation are the share of humans and no differentiation is nature as it is” and I wonder if artist Kim, Gap-jin is yearning for the latter. Through ⌜Walden⌟ by Henry David Thoreau whom he respected and made him as his teacher, we can see his attitude towards life and understand.
He is like a lonely wander wanting to go to the world with no differentiation while seeing and differentiating humans and nature at the same time. He can be said to a painter with a fine sense that can be touched by a weak flower that came across walking in the lonely desert and feel the universe order in it. 
Creative work is expressive act that requires intuition in absolute perspective and I believe that the only indomitable will flying with both winds of freedom and innocence against north wind and cold snow is the best weapon of a painter. 
Painter Kim, Gap-jin with representation as a true artist in this era. However, today’s reality may ask for ideas or fanciness that can be exchanged with gold and may be an eyesore from people around him. But, he will never abandon firm fidelity enduring his life as the true artist while cherishing ties of communication with the world.Mental power armed in his inner side keeps fluttering even in the desolate environment and he will not stop the pace going to beautiful way and rising above the worldy matters in the future. 
Finally, I applaud his family and brother who sponsors generously and hope that more and more people can recognize the true potential of the world of his works and share it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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